지은석. 나에게 영감은 ‘떨리는 순간’이다.

Moments of Inspiration
잊히지 않는 영감, 단 하나의 순간이 있다면?
길스토리 프로보노 9인에게 ‘영감의 순간’에 대해 물었습니다.

지은석
EUNSEOK JI / FILM DIRECTOR

영상감독 지은석은 광고를 전공하고, 다변하는 미디어 채널에 적합한 영상을 제작하고자 자신의 회사를 차린 젊은 청년 창업가다. 눈보다는 마음을 사로잡는, 그래서 사람에게 유익한 영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

‘처음’ 또는 ‘강렬하게’ 영감을 받았던 순간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___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감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는 ‘처음’, ‘강렬하게’라는 단어에 더 집중한 대답인 것 같네요. 살다 보면 무언가 강력하게 다가오는 느낌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 그냥 ‘감각적으로’, ‘느낌적으로’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에너지를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즐겨 가던 카페에서 늘 그렇듯 ‘아아’를 주문하고 계산을 하는데 주문을 받은 여자분을 쳐다보고 ‘처음’으로 ‘강렬하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다. 커피를 건네받고 자리로 돌아왔지만 하려던 일들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그날 시집을 몇 권 샀기에 그 시집의 첫 장을 찢어 인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직진한 경로를 두어 차례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나가기 전에 쪽지와 명함을 건네고 사무실로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 쪽지로 연락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도 세 번 정도 편지를 써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자신의 짝은 이렇게 느낌적으로 알아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그날의 감정은 저에게 신기한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강렬하게’ 다가온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해주지만, 지금의 아내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입니다.

최근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무엇’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___ 아무래도 영상을 업으로 하기 때문에 유튜브에 있는 영상들을 습관처럼 많이 보게 됩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생각해보니 카페에서 영감을 많이 받네요) 일본의 장인들을 담은 영상을 보았는데 무언가 강한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손으로 반복되는 과정 끝에 나온 작품은 너무 근사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채널에 있는 영상을 전부 봤어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네에 숨어 있는 장인들을 찾아서 기록해볼까(오래된 열쇠집이나 도장집처럼) 생각하다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 중에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무형 문화재. 설레는 마음으로 이분들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상은 스태프들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장 하기가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예산을 마련해야 해서 처음 2년 정도는 예산을 받을 수 있는 개인과 단체에 문을 두드려보았습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공모 사업에 기획서도 제출해보고 전국의 도청과 시청에 모두 전화를 돌려보았습니다. 방법도 모르고 의지만 가지고 문을 두드려서 2년이 넘어가는 시점에도 예산은 ‘0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같이 영상을 하는 촬영 감독님이 제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한번 먼저 만들어 보자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그다음 주에 협회를 찾아가 무형 문화재 선생님을 소개해달라고 하고 바로 범종을 만드시는 주철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뜻을 좋게 봐주신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을 소개해 주셔서 한 분 한 분 섭외와 촬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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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___ 그렇게 영상에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뵙고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재미있겠다!’,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어느덧 스무 명이 넘는 각 분야의 전문가분들이 이 일에 뜻을 함께해 주시고 유튜브 채널에 10편 가까운 영상이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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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장 편> 새벽 타종 인트로

한국 종에는 ‘맥놀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외국의 종에는 없는 특징인데 사람의 맥이 뛰는 것처럼 소리가 사라질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명하자면 어렵고 신비한 부분이어서 ‘주철장’ 1편의 첫 장면으로 산사에서의 타종 신을 넣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보다는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전국의 절을 돌고 찾아 차로도 못 가는 산속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스님의 새벽 타종에 맞춰 준비해서 한국 종의 ‘맥놀이’ 현상을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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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장 편> 종 제작 모습

‘악기장’을 찍을 때는 가야금의 몸통이 되는 오동나무에 집중했습니다. 살아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노지에 널어 두길 7년. 그사이에 썩는 것들은 썩고 살아남은 것들만 악기로 만들어 냅니다. 추운 겨울과 비바람을 그리고 뜨거운 여름을 이겨내야만 아름다운 울림통이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7년의 세월을 기록할 순 없지만, 계절의 변화는 담아내고 싶어서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 그곳을 찾아가 오동나무를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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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장 편> 오동나무 삭히는 모습

가야금의 현인 명주실은 누에고치에서 나옵니다. 보통 명주실을 가야금에 거는 부분만 담아내는데 누에라는 동물에게서 악기의 현이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림이 외국인들에게 꽤 매력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누에 농장에서 촬영하고 명주실을 만드는 농방에 가서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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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장 편> 3대째 명주실을 만드는 농방

이렇듯 이 일은 사람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기다려야 하고 자연의 신호를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장인들은 인이 박인 일관된 태도로 끊임없는 반복의 작업을 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상에는 자연의 풍경과 반복되는 작업 신이 많이 등장합니다. 제가 처음 일본의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았던 부분은 아마 미련하리만큼 한자리에서 반복된 무언가를 하는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생산성과 효율이 기준이 되는 시대에 그것에 역행하듯 매일같이 그곳에서 그 일을 하는 태도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영상은 조금 느긋합니다. 한 번에 다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장인들의 태도와 호흡을 닮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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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lture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KultureOfficial)>

나에게 영감이란?
___ 나에게 영감은 ‘떨리는 순간’이다. 처음 아내를 만난 순간도, 무형문화재를 기록하자고 마음먹은 순간도 그 신호탄은 ‘떨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떨리는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영감은 나를 찾아가는 미로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감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벤트를 꿈꾸며 살아가지만 실상 현실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며 또 내일입니다. 저도 영상을 하면서 영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작업하지만, 영감은 논에 맺혀 있는 쌀알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씨를 뿌리고 매일 논에 나가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입 벌리고 하늘을 쳐다봐도 영감이 떨어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